숙종이 남긴 환국 정치는 조선 조정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서인과 남인은 이제 단순한 정적을 넘어 서로를 전멸시켜야 할 원수로 여겼고, 이는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 대를 거쳐 영조가 즉위할 때까지 극단적인 대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영조는 즉위 전부터 붕당 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온몸으로 겪으며 왕위에 올랐기에, 붕당의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 편에서는 영조가 무너진 정치적 균형을 잡기 위해 꺼내 든 '탕평책'과 백성들의 가장 큰 고통을 덜어주고자 했던 '균역법'의 실체를 살펴보겠습니다.

1. 탕평비와 완론탕평, 억지 균형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조정의 고질병인 붕당 정치를 타파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성균관 입구에 "신용이 있고 편벽되지 않음은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요, 편벽되고 신용이 없음은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라는 글귀를 새긴 '탕평비'를 세웠습니다. 말 그대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정치를 하겠다는 왕의 강력한 의지 표명이었습니다.

영조가 선택한 방식은 각 붕당에서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들을 고루 등용하는 '완론탕평'이었습니다. 노론과 소론, 남인과 북인을 골고루 섞어 정국을 운영하려 한 것입니다.

내가 만약 당시 평생을 바쳐 특정 붕당의 이념을 따르던 대신이었다면, 왕이 느닷없이 "너희가 옳고 그른 것은 상관없으니 무조건 저쪽과 악수하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명령할 때 겉으로는 따르는 척해도 속으로는 엄청난 반발심이 들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영조의 탕평책은 근본적인 갈등의 원인을 해결하기보다 왕의 강력한 권위로 신하들의 입을 억누른 '임시방편'에 가까웠습니다. 이 억눌린 갈등은 훗날 사도세자의 비극이라는 왕실 잔혹사로 이어지는 불씨가 되기도 했습니다.

2. 군역의 모순을 혁파하다, 균역법의 도입

영조는 정치적 개혁에만 머무르지 않고, 백성들의 삶을 옥죄던 가장 큰 민생 문제에 칼을 댔습니다. 당시 조선의 백성들에게 가장 가혹한 부담은 군대에 가는 대신 군포(옷감)를 내는 '군역'이었습니다. 당시 1년에 군포 2필을 내야 했는데,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이미 죽은 사람에게 군포를 물리는 '백골징포', 갓 태어난 아기에게 물리는 '황구첨정' 같은 막장 상황이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만약 당시 가난한 농부였다면, 굶어 죽어가는 자식의 입에 밥 한 숟가락 넣어주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갓 태어난 아기의 군포까지 내라고 독촉하는 관군들을 보며 나라를 저주했을 것입니다. 영조는 이 끔찍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1750년, 백성들이 내야 하는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과감하게 절반을 줄여주는 '균역법'을 전격 시행했습니다.

3. 줄어든 재정, 기득권의 주머니를 털어 메우다

군포를 절반으로 줄이자 당장 국가 재정에 거대한 구멍이 생겼습니다. 영조는 이 부족한 세수를 메우기 위해 머리를 썼습니다. 부족한 재정은 백성이 아닌, 그동안 세금을 내지 않던 기득권층과 부유한 자들의 주머니에서 채우도록 시스템을 설계했습니다.

일부 유족(양반층)에게 '선무군관'이라는 명예직 타이틀을 주고 그 대가로 1필의 군포를 징수하는 '선무군관포'를 신설했고, 토지를 가진 지주들에게 토지 1결당 쌀 2말을 거두는 '결작'을 부과했습니다. 또한 그동안 지방 관청이나 개인이 독점하던 어장세, 염세(소금세), 선박세를 국가 재정으로 귀속시켰습니다.

이 개혁은 기득권층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양반과 지주들은 "왜 우리가 백성들과 똑같이 세금을 내야 하느냐"며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하지만 영조는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왕의 책무라는 명분으로 이를 밀어붙였습니다. 균역법은 비록 신분제 자체를 개혁하지는 못했다는 한계가 있지만,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부의 재분배와 민생 안정을 실현하려 했던 조선 후기 최고의 행정 혁신 중 하나였습니다.

영조의 52년이라는 긴 치세는 붕당의 기세를 꺾어 왕권을 다시 세우고, 서적 편찬과 형벌 제도 개혁(가혹한 고문 금지 등)을 통해 조선의 시스템을 안정적인 궤도에 올려놓은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이 안정된 토양은 그의 손자인 정조 대에 이르러 조선의 마지막 르네상스로 만개하게 됩니다.

[핵심 요약 3줄]

  • 영조는 극단적인 붕당 정치를 종식하기 위해 온건파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하고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워 왕권 중심의 정국을 마련했습니다.

  • 백성들의 가장 큰 고통이었던 군역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 군포 부담을 절반(2필에서 1필)으로 줄여주는 '균역법'을 시행했습니다.

  • 줄어든 국가 재정은 지주들에게 '결작'을 거두고 부유층에게 '선무군관포'를 징수하는 등 기득권층에게 부담을 지워 민생 안정을 도모했습니다.

[다음 편 예고]

영조가 다져놓은 탕평의 기반 위에서, 할아버지보다 한 단계 더 진화한 정교한 개혁을 꿈꾼 젊은 군주가 등장합니다. 다음 편에서는 규장각을 통한 인재 양성과 수원 화성 축조를 통해 조선 후기 문화와 과학의 정점을 보여준 '정조와 수원 화성, 규장각을 통한 조선 후기 르네상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